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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는날 만나자 -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 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있는

군밤장수한테 다가가 군밤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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