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 (1994-2005) _ 이병률 산문집 中 #20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을, 아니 다시 태어나야 할 베니스의 건물 벽은 하늘을 닮았다. 창문을 닮았다. 들판을 닮았다. 벽에 눕고 싶다. 저 벽들을 찢어 넣고 가고 싶다. 모조리 배에 태워 서울로 부치고 싶다. 베니스엔 창문이 많다. 사람 사는 집에는 으레 창문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워낙 엄청난 습기를 안고 사는 도시라 그런지 모든 벽은 태양을 향해 뚫리고 창문이 만들어진다. 창문이 많아서 사람들은 창문에 매달려 산다. 창문에 매달려 빨래를 널고 창문에 매달려 이웃과 얘기를 나누며 창문을 딛고 서서 세상을 보려 한다. 창문을 올려다보며 어린아이가 자라고, 사각 창문에 맞춰 삶이 재단되고 인화된다. 숱하게 다닌 곳 가운데 어디가 제일 좋냐고, 어디서 살..
끌림 (1994-2005) _ 이병률 산문집 中 #018 사랑해라 사랑해라. 시간이 없다.사랑을 자꾸 벽에다가 걸어두지만 말고 만지고, 입고 그리고 얼굴에 문대라.사랑은 기다려주지 않으며,내릴 곳을 몰라 종점까지 가게 된다 할지라도 아무 보상이 없으며오히려 핑계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사랑해라. 정각에 도착한 그 사랑에 늦으면 안 된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 나란히 볼 수 없는 것.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밖에 없는 것.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 내릴 수도 없는 것.그 후로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 것.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우주를 바라보는 방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그러다 어쩌면, 세상을 ..
끌림 - 이병률 산문집 #001 '열정'이라는 말 열정이란 말에는 한 철 태양이 머물다 지나간 들판의 냄새가 있고, 이른 새벽 푸석푸석한 이마를 쓸어올리며무언가를 끼적이는 청년의 눈빛이 스며 있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타고 떠날 수 있는 보너스 항공권 한 장에들어 있는 울렁거림이 있다. 열정은 그런 것이다. 그걸 모르면 숨이 막힐 것 같은 어둠에 놓여 있는 상태가 되고,그걸 갖지 아니하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낯선 도시에 떨어진 그 암담함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강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