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끌림 (1994-2005) _ 이병률 산문집 中
#20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을, 아니 다시 태어나야 할
베니스의 건물 벽은 하늘을 닮았다. 창문을 닮았다. 들판을 닮았다. 벽에 눕고 싶다.
저 벽들을 찢어 넣고 가고 싶다. 모조리 배에 태워 서울로 부치고 싶다.
베니스엔 창문이 많다. 사람 사는 집에는 으레 창문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워낙 엄청난 습기를
안고 사는 도시라 그런지 모든 벽은 태양을 향해 뚫리고 창문이 만들어진다.
창문이 많아서 사람들은 창문에 매달려 산다. 창문에 매달려 빨래를 널고 창문에 매달려 이웃과 얘기를 나누며
창문을 딛고 서서 세상을 보려 한다. 창문을 올려다보며 어린아이가 자라고, 사각 창문에 맞춰 삶이 재단되고 인화된다.
숱하게 다닌 곳 가운데 어디가 제일 좋냐고, 어디서 살고 싶으냐고 물어오는 질문에 난 수십 번쯤 베니스라고 답했고
그러므로 수십 번쯤 죄를 지었다는 느낌. 어떤 극찬도 베니스에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선 이물스러운 발언일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한 여행지의 개인적인 경험 혹은 인상은 함께 동행하지 못한 사람에게 허황한 허사에 그치기 쉽다.
여러 번 밤 기차를 타고 달려갔던 베니스는 엄살뿐인 생채기를 핥아주었고 돌아가 잘 살라고 역까지 따라 나와
다독거려주었다. 베니스의 흥망성쇠는 무엇이 가슴을 뜨거워지게 하는가를 알게 했으며, 골목골목에 모가지를 내민
그들의 빨래 냄새는 모든 세상의 이치를 잘 다려줄 것만 같아 정신 들게 한다. 그 신세들이 내 빚의 일부일 테지만
갚을 수 없는 빚 대신 나는 베니스에 관한 그리움을 안고 산다는 것 말고 또 다른 계산을 해줄 건 없지 않을까 싶다.
어디서 태어나고 싶은가. 불행히도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면 말이다.
옆집의 사내 아이로 태어나고 싶은가. 아니면 기찻길 옆 오막살이 삶을 택할 것인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 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며,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세상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태어나고 싶은가. 태어나야 한다면 얼마를 준비할 것인가. 얼마를 돌이킬 참인가.
그래, 다음 생에 우리는 베니스에서 태어날 것이다. 당신과 나는 꼭 그리할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가진 게 없어 불행하다고 믿거나 그러지 말자.
문밖에 길들이 다 당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주인이었던 많은 것들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던가.
'기억하고 싶은 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월의 시] 6월_황금찬, 6월의 달력 _ 목필균 (0) | 2018.06.10 |
---|---|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 정희재 (0) | 2018.05.15 |
벚꽃 시 모음 _ 정연복, 용혜원, 한용운, 김승동, 이기철, 박인혜 (0) | 2018.04.04 |
끌림 (1994-2005) _ 이병률 산문집 _'사랑해라' (0) | 2018.03.13 |
하늘 아래 있는 것은 다 마찬가지 (0) | 2018.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