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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얘기

끌림 (1994-2005)

(๑>ᴗ<๑) 2018. 1. 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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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이병률 산문집




#001 '열정'이라는 말


열정이란 말에는 한 철 태양이 머물다 지나간 들판의 냄새가 있고, 이른 새벽 푸석푸석한 이마를 쓸어올리며

무언가를 끼적이는 청년의 눈빛이 스며 있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타고 떠날 수 있는 보너스 항공권 한 장에

들어 있는 울렁거림이 있다. 열정은 그런 것이다. 그걸 모르면 숨이 막힐 것 같은 어둠에 놓여 있는 상태가 되고,

그걸 갖지 아니하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낯선 도시에 떨어진 그 암담함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

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004 그렇게 시작됐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그래요.

한 사람의 것만으론 가 닿을 수 없는 것,

그러기엔 턱없이 모자라고 또 모자란 것,

그래서 약한 물살에도 떠내려가버리고 마는 것,

한 사람의 것만으론 이어붙일 수 없는 것,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게 되는 것.


자, 지금까지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얘기를 했어요.

이 그림 제목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거예요.


근데 나는 과연 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005 시간을 달라


「넌 뭘 좋아해?

음, 난 TV를 크게 켜놓고 많화책 보는 시간이랑,

친구가 사준 창가 화분에 떨어진 잎사귀를 주워

유리컵에 담아두는 일이랑,

음,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을 좋아해. 너무너무 좋아해.」


아마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순간, 공중에서 새 한마리가 날아와

내 어깨에 내려앉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새는 내 귀에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제 됐어. 그녀가 침묵을 깨고, 이제 시작한 거야. 축하한다구」


나는 이렇게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의 습관을 이해하고, 당신의 갈팡질팡하는 취향들을 뭐라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당신이 먹고 난 핫도그 막대를 버려주겠다며

오래 들고 돌아다니다가 공사장 모래 위에 이렇게 쓰는 것.


「사랑해」


그러니 나에게 시간을 달라.

나에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








#013 길


햇빛 비치는 걸을 걷는 것과 그늘진 길을 걷는 것, 어느 길을 좋아하지?

내가 한 사랑이 그랬다.

햇빛 비치는 길과 그늘진 길. 늘, 두 길 가운데 어느길을 걸을까 고민하고 또 힘들어 했다.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두 길 다 사랑은 사랑이었는데, 두 길 다 내 길이었는데

왜 그걸 두고 다른 한쪽 눈치를 보면서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했을까?


지금 당장 먹고 싶은 것이 레몬인지 오렌지인지 그걸 모르겠을 때

맛이 조금 아쉬운데 소금을 넣어야 할지 설탕을 넣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어젠 그게 분명히 좋았는데, 오늘은 그게 정말로 싫을 때

기껏 잘 다려놓기까지 한 옷을, 빨랫감이라고 생각하고 세탁기에 넣고 빨고 있을 때


이렇게 손을 쓰려야 쓸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 오면 떠나는 거다.








#014 멀리


가야지요.

차곡차곡 쌓은 환상을 넘겨보려면......

가야지요.

때론 그것들이 조용히 허물어지는 것도 봐야죠.








#015 함께


..........

비록 뒷모습이지만 그 모든게 똑같다는 사실에 난도 모르게 목이 메어왔다.

뭔가 빠진 듯 허전하고 익숙하지 않던 여행에서 가슴속 독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측은하지만 대견하고, 쓸쓸하지만 듬직한 뒷모습.

나도 저런 뒷모습을 가졌을까. 저건 내 모습잉기도 한 걸까.


나는 그에게 애써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뭘 먹이려 했고 어디든 같이 가자 했고 지난 시간들을 얘기하려 애썼다.


그의 뒷모습은 나 혼자 감당하기 힘든 나이기도 해서

난 모든 걸 해제하고 혼자이길 원했던 고집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가는 길을, 내 뒷모습 모두를 나도 한번 따라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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